지어진 지 수백 년에서 수천 년이 지난 건축물을 보면 경이롭습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성당을 떠올릴 수 있겠죠. 여러분은 ‘성당’ 하면 어디가 떠오르나요? 프랑스에 있는 노트르담 대성당, 독일의 쾰른 대성당 등이 떠오를 수도 있고, 스페인에 있는 독특한 외관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나, 아이슬란드의 할그림스키르캬 성당을 생각하는 분도 있을텐데요.
하지만 역시 가톨릭의 성지, 바티칸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과 로마의 유서 깊은 여러 성당의 모습이 가장 먼저 뇌리를 스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까요. 로마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는 많지만, 로마의 여러 성당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영화는 댄 브라운(Dan Brown)의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된 ‘천사와 악마’일 겁니다.
댄 브라운 소설과 영화의 특징이라고 하면 우선 댄 브라운 세계관에 연속성을 부여하는 존재, 로버트 랭던 교수라는 캐릭터,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 속도감,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계 주요 도시의 명소를 돌아다니며 강제로 간접 관광(?)을 해야 한다는 점을 들 수 있겠죠. 《다빈치 코드》는 파리와 런던, 《로스트 심벌》은 미국 워싱턴 D.C.에서, 《인페르노》는 이탈리아 피렌체와 베네치아, 터키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사건이 진행되는 덕분에 영화와 함께 각 도시의 역사적, 예술적 명소를 구경하는 즐거움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천사와 악마》는 이탈리아 로마와 바티칸 시국을 중심으로 서사가 전개되는 덕분에, 로마에 있는 주요 성당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을 실컷 볼 수 있습니다. 쉽사리 여행을 갈 수 없는 시기가 계속되고 있는데요, 론 하워드 감독, 톰 행크스, 아예렛 주러, 이완 맥그리거 주연의 영화 ‘천사와 악마’에서 신발 굽이 닮도록 뛰어다니는 랭던 교수와 함께 오랜 세월 자리를 지키고 있는 로마의 여러 성당을 돌며 랜선 관광을 떠나 볼까요?
*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아직 보지 않으신 분은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영화는 바티칸의 수장, 교황이 서거하면서 시작됩니다. 새로운 교황 선출을 위한 콘클라베에 참석하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추기경이 바티칸으로 속속 모여들죠. 한편 스위스에 있는 유럽입자물리연구소 CERN에서는 ‘신의 입자’라고도 불리는 반물질 생성 실험에 성공합니다. 하지만 축하해야 할 순간, 담당 연구자는 살해당하고 생성에 성공한 세 개의 반물질 중 하나가 사라집니다.
하버드대 기호학 교수인 로버트 랭던(톰 행크스)은 바티칸으로부터 암호 해독을 요청받습니다. 이들이 보여준 암호는 앰비그램. 상하, 좌우로 뒤집어도 같은 모양이 되도록 쓰인 텍스트로, 수백 년 전 ‘일루미나티’라는 비밀 조직이 사용했다고 알려진 기호였습니다.
‘계몽된 자’라는 뜻의 일루미나티(Illuminati)는 수 세기 전 결성된 물리학자, 천문학자, 수학자 등으로 구성된 조직으로 본디 과학적 진실을 알리는 것을 소명으로 하였으나 바티칸의 탄압으로 지하로 숨어들어 비밀 조직이 되었다는 설정으로 나옵니다. 이 일루미나티가 수백 년 만에 돌아와 바티칸에 복수하기 위해 콘클라베 직전 차기 교황 후보 네 명을 납치했고, 이들을 물, 불, 흙, 공기를 상징하는 장소에서 차례로 처형한 뒤 자정이 되면 반물질을 이용해 바티칸을 “빛으로 소멸”하겠다고 협박해 온 것이었습니다.
암호 해독을 돕기 위해 바티칸의 스위스 근위대 사무실에 도착한 랭던 교수는 CERN 소속 비트라 박사(아예렛 주러)를 만납니다. 협박범이 보낸 영상에서 힌트를 얻은 이들은 추기경을 구하기 위해 과거 일루미나티가 남긴 단서를 좇고, 숨겨진 일루미나티의 교회, 즉 ‘빛의 교회’를 찾아 나섭니다.
바티칸 기록보관소에서 얻은 단서로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 판테온이었습니다. 하지만 단서가 실제로 가리키는 곳은 판테온이 아닌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의 키지 예배당이었죠. 뒤늦게 올바른 장소로 향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추기경 한 명이 사망한 채로 남겨져 있었습니다.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del Popolo)
1099년 교황 파스칼 2세에 의해 세워졌으며 15세기에 재건된 르네상스 양식의 성당으로, 로마 포폴로 광장의 북쪽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델 포폴로del Popolo는 ‘시민의, 백성의’라는 뜻으로, 성당 이름은 ‘백성의 성모 마리아’라는 의미입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자리에는 네로 황제의 묫자리가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자란 호두나무에 악령들이 출몰해 백성들을 괴롭힌다는 소문을 듣고 교황 파스칼 2세가 나무를 베고 그 자리에 성당을 세웠다고 전해집니다. |
다음 장소를 고민하던 랭던 교수는 키지 예배당 안에 있던 베르니니의 조각상을 보고 빛의 교회로 향하는 길이 아직 남아 있음을, 그리고 두 번째 목적지는 성 베드로 광장임을 깨닫습니다. 일행은 다시 바티칸으로 빠르게 향하지만, 다음 교황을 기다리는 인파로 가득한 광장 구석에 두 번째 추기경이 쓰러져 있었죠. 이미 늦은 겁니다.
성 베드로 광장(Saint Peter’s Square)
바티칸 시국의 중심, 성 베드로 대성당 앞에 있는 광장으로, 17세기 이탈리아 예술계의 거장 베르니니가 설계하고 지었습니다. 간혹 뉴스 리포트에서 바티칸 궁전의 창문에 선 교황을 올려다보는 수만 명의 사람이 모인 광장이 나오는데, 그곳이 바로 성 베드로 광장입니다. 좌우 너비는 약 240m로 최대 30만 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광장 한가운데 있는 오벨리스크는 로마제국 당시 칼리굴라 황제가 경기장을 장식하기 위해 이집트에서 가져온 것인데, 16세기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고 전해집니다. |
세 번째 장소에 대한 힌트를 얻기 위해 다시 기록보관소로 내려간 랭던 교수는 반물질 수색을 위해 전력이 차단되며 외부에서 공급되던 산소가 끊겨 질식할 위기에 처하지만, 구사일생으로 탈출해 산타 마리타 델라 비토리아 성당으로 향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시간을 맞추지 못했습니다.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Santa Maria della Vittoria)
17세기 초에 지어진 작은 성당으로, 당초 성 바울에게 헌정되었으나 ‘화이트 산’ 전투에서 가톨릭이 승리하며 다시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되었습니다. 특히 왼편의 제단에 있는 베르니니의 작품, 영화에도 잠깐 등장하는 ‘성 테레사의 환희’ 조각상으로 유명합니다. |
세 번째 추기경을 구하는 데 실패한 랭던 교수는 네 번째 장소, 피우미 분수로 향합니다. 그리고 무거운 물체에 묶인 채로 분수에 빠져 죽을 뻔한 마지막 추기경을 가까스로 구하는 데 성공하죠!
피우미 분수(Fontana dei Quattro Fiumi)
고대 로마 시절 전차 경기장으로 사용되던 나보나 광장(Piazza Navona)의 중앙에 있는 분수로, 1651년 베르니니가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를 위해 설계했습니다. 분수의 정식 명칭은 ‘네 개의 강 분수’인데, 분수의 중앙에 있는 암석으로 조각된 네 개의 거인이 교황의 권위가 전파된 대륙의 4대 강, 즉 아프리카의 나일강, 유럽의 도나우강, 아시아의 갠지스강, 아메리카의 리오 데 라 플라타강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
네 번째 추기경이 제시한 단서로 산탄젤로 성을 거쳐, 결국 반물질이 바티칸 지하에 있는 성 베드로의 무덤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일행은 서둘러 성당 지하로 내려갑니다. 어렵게 반물질을 발견하는 데 성공했지만, 물질을 안정시켜 주던 장치의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아 곧 폭발할 상황.
궁무처장(이완 맥그리거)은 반물질을 빼앗아 광장에 있던 헬리콥터를 타고 하늘 위로 올라갑니다. 곧 상공에서 반물질이 폭발하며 마치 태초가 만들어지던 순간을 재현하는 듯한 빛을 보여주고, 광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궁무처장의 희생정신에 충격과 감동을 받으며 눈물짓습니다.
궁무처장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바티칸은 이제 안전한 걸까요? 콘클라베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마어마한 속도감으로 두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흘러가는 ‘천사와 악마’. 다양한 건물들이 등장하지만, 건축학적 관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은 영화 초반에 잠시 등장했던 판테온입니다.
축조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7세기부터 성당으로 쓰였다는 로마의 판테온은 원통형의 본당에 직사각형 현관이 붙어 있는 형태의 건물로, 천장에는 정중앙에 구멍이 뚫린 콘크리트 돔이 있습니다. 그저 오래된 튼튼한 건물처럼 보이는 판테온이 놀라운 점으로 크게 두 가지를 꼽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로마 콘크리트입니다. 로마 시대의 건축 기술은 유명하죠. 지금 이탈리아 로마로 관광을 떠나면 우리가 보게 될 콜로세움, 판테온, 포로 로마노,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등 관광 명소의 대부분이 적게는 수백 년, 길게는 약 2,000년 동안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들입니다. 사실 오늘날의 콘크리트를 사용하기 시작한 건 약 150년 정도로 역사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이전까지는 로마식 콘크리트를 사용해 왔죠.
로마 콘크리트의 가장 큰 차이점이자 특징은 화산재를 섞는다는 점입니다. 포졸라나(Pozzolana)이라고 불리는 이 화산재는 나폴리 근처의 베수비오산 인근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 화산이 고대 로마 시절 분화하여 파괴한 도시가 바로 폼페이입니다. 로마인들은 석회를 달궈 부순 가루에 골재(돌이나 자갈), 물을 섞어 반죽하는 것까지는 동일하지만 여기에 포졸란을 섞어 콘크리트의 강도를 훨씬 높였습니다. 판테온은 물론이고 콜로세움도 이 로마 콘크리트를 이용해 세워졌습니다. 오늘날 콘크리트의 수명이 100년 전후로 추정되는 것과 비교하면 약 2,000년 동안 비바람을 견디며 서 있었던 로마의 구조물들은 그저 신기할 따름입니다.
두 번째는 판테온의 돔 천장입니다. ‘아치’는 로마 건축 양식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심지어 콜로세움의 창문 상단은 모두 아치 형태로 만들어져 있을 정도이죠.
아치는 굉장히 안정적인 형태의 건축 양식입니다. 두 개의 기둥이 하나의 기다란 판을 받치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위에서 일정량 이상의 힘으로 판의 가운데를 누르면 힘을 받은 곳은 부러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아치의 경우, 아치를 구성하는 각 블록이 위에서 내려오는 힘을 분산 시켜 아래로 내려보내기 때문에 훨씬 안정적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건축물을 보면 상부를 받치기 위해 수십 개에 달하는 거대한 기둥이 세워져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죠. 아치를 사용하면 하중을 훨씬 더 안정적으로 견딜 수 있기 때문에 기둥의 개수를 줄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쐐기돌(Keystone)입니다. 아치의 꼭대기에 들어가는 가장 큰 블록인 쐐기돌은 가장 높은 곳, 정 중앙에 있기 때문에 다른 블록으로 힘을 분산시켜 주는, 아치의 모든 영역에서 힘을 가장 크게 받는 돌입니다. 이 쐐기돌을 빼버리면 나머지 아치 블록은 와르르 무너질 겁니다. 그런데 판테온의 천장을 떠올려 보세요. 가장 큰 힘을 받는 바로 그 부분이 뚫려 있죠.
더군다나 돔을 지지하는 것은 외벽 면의 기둥들뿐입니다. 어마어마한 콘크리트 돔의 무게를 분산하기 위해 돔은 천장으로 갈수록 두께가 얇아집니다. 대신 아래로 내려올수록 두꺼워지고, 하단에 가해지는 압력을 안정적으로 지지하기 위해 계단식 구조를 사용했죠. 그래서 판테온의 천장은 내부에서 보면 아주 둥근 반구의 형태이지만, 외부에서 보면 조금 더 평평한 모습입니다.
철근을 사용하지 않고 순수 콘크리트로만 지어진 판테온은 현대 기술로도 재현하기 어려운 구조물이라고 합니다.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로마의 판테온을 쌓아 올린 고대인들의 건축 기술은 때로는 경이롭기도 하지만 우리가 상상력을 펼칠 수 있도록 영감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영화 ‘천사와 악마’처럼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