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로리와 송국리…, 역사의 순간들에 함께 한 기후
기후의 힘. 간결한 제목입니다. 그 간결함만큼 요즘 더 와 닿는 직관적인 제목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굴지만,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기후’에 뭔가 문제가 벌어지고 있다는 걸 조금씩은 느끼고 있습니다. ‘이상기후’ 혹은 ‘기후이변’이라는 말이 자주 뉴스에 등장하는데, 그때 그 뉴스는 어디 먼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나-우리가 몸으로 겪고 있는 일입니다.
물론 기후의 힘을 꼭 이상기후/기후이변에서만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삶의 많은 것은 기본적으로 ‘기후’에서 비롯합니다. 살면서 꼭 갖추어야 하는 기본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의식주’를 생각해보죠. 우리 의식주의 상당한 부분은 기후에 제한을 받으며, 주어진 기후 조건 안에서 최선을 추구한 (혹은 최악을 배제한) 결과물들입니다. 그 결과물들을 조금 더 거창하게 부르면 문명이 되겠죠.
그래서 《기후의 힘》의 부제는 ‘기후는 어떻게 인류와 한반도 문명을 만들었는가?’입니다. 4계절이 뚜렷하고, 여름은 고온다습하며 겨울은 한랭건조한 기후 속에서 한반도에 살아온 사람들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난방문화인 ‘온돌’을 발전시켰고, 여름을 시원하게 나기 위해 개방감 있는 한옥 구조를 진화시켜 왔습니다. 우리가 입는 옷, 우리가 먹는 음식들 역시 기후와 지리라는 조건에 적극 대응해온 결과물들인겁니다.
하지만 《기후의 힘》은 우리 삶에 기후가 미치는 영향과 인과관계를 손쉽고 재미있게 보여주는 그런 책은 아닙니다. 부제(‘기후는 어떻게 인류와 한반도 문명을 만들었는가?’)의 문제의식을 ‘알쓸신잡’식 잡학사전처럼 풀어줄 수도 있었을 텐데도, 그런 길은 가지 않습니다. 한국의 기후를 이야기하고 그에 대한 응전의 하나로 김장문화를 이야기하고 그것의 현대적 버전으로 김치냉장고를 이야기하는 식의 ‘재미 뿜뿜’ 기후 얘기 대신 기후가 슬쩍슬쩍 ‘간을 보는’ 그런 ‘큰-역사’를 보여줍니다.
소로리 볍씨
그 ‘큰-역사’ 중의 하나가 ‘소로리 볍씨’입니다. 이 책에서 처음 소로리 볍씨를 알게 됐는데요, 그러고 나서 검색해보니 관련된 기사나 논문, 단행본 등이 꽤 많은 양입니다. 다 읽을 수는 없고 그중 몇 십 건만 찾아 읽어도 시간이 ‘슝-’ 갑니다. 그만큼 재미있습니다. 심지어 소로리 볍씨는 국립국어원의 ‘우리말샘’에도 농업용어 중 하나로 올라가 있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소로리의 다층위 구석기 시대 유적에서 발견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 가장 오래된 볍씨로 알려졌던 중국 후난성의 11,000년 전 볍씨보다 수천 년 더 오래된 것이다.”
2003년 10월 22일 영국 공영방송 BBC의 웹사이트에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가 한국에서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소개되었습니다. 네 개 종의 탄화미 총 59톨이 발견되었고 이 중 일부의 탄소연대를 측정해보니 1만 5000년 전으로 산출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시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로 인정받던 중국 후난성 출토 볍씨보다 무려 4000년이나 오래된 것이라는 소식은 흔한 국뽕 뉴스 같습니다. 우리나라가 농업 역사도 짱! 세계 벼의 기원은 한반도!
하지만 탄소연대 측정만으로 모든 논쟁이 정리되고 역사책에 올라가는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소로리 볍씨를 둘러싼 논쟁은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그것이 정말 1만 몇 천 년 전의 볍씨인 것은 거의 분명해 보이지만, 그것이 야생 벼인지 재배 벼인지 아직 해명되지 않았고, 또 벼의 한반도 기원설로 이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보다 이때부터 한반도에서 벼를 기르기 시작한, 즉 농경문화가 시작되었다는 증거도 아직은 부족하기만 합니다. 왜냐 하면 어떤 역사적 이벤트이던 그 후대로도 뭔가 연관이 있어야 비로소 역사적인 의미를 탐색할 수 있을 것인데, 소로리 볍씨 이후 근 1만년 동안 한반도에 다른 농경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이 소로리 볍씨 논쟁에 기후의 눈으로 접근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금까지 아열대종인 야생 벼가 발견된 적이 없는데,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한반도에 현재 존재하지 않는 야생 벼가 과거, 그것도 지금보다 훨씬 추웠던 빙기에 서식하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이것이 소로리 볍씨가 의구심을 낳는 이유다. 야생 벼가 자연 서식하기에는 당시 한반도 환경이 너무나 척박했다. 야생 벼의 서식이 아예 불가능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1만 5000년 전의 한반도 기후 환경을 고려할 때 확률적으로 그 가능성이 상당히 낮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1만 5000년 전이면 온난·습윤한 뵐링기가 시작되기 전으로 여전히 매우 추웠던 시기이다. 동북아시아에서 (…) 최종빙기 최성기에 비견되는 혹독한 추위가 급습하던 시기였다. 기간이 짧아서 생태계에 미치는 충격이 적었을 뿐 한랭·건조한 정도는 그 이전의 최종빙기 최성기에 못지않았다. 따라서 이 시기에 아연대성 식물인 야생 벼가 한반도에서 자연 서식하고 있었다는 주장은 고생태학적 측면에서 봤을 때 받아들이기 어렵다.”
“일부 고대 벼의 탄소 연대치는 12500~12600BP로 나왔고, 이를 보정하면 1만 4700년 전 정도로 산출된다. 바로 북대서양 지역에서 엄청난 속도로 기온이 상승하던 뵐링기의 시작 시점이다. 혹시 기온이 빠르게 오르면서 야생 벼가 한반도까지 서식 영역을 넓힐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 또한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정이다. 북대서양과 달리 동북아시아의 기온 변화는 천천히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반도는 해양과 가까워 변화 경향이 더욱 완만했다. 제주도 하논의 분석 결과에 의하면 뵐링기의 기온은 최종빙기 최성기보다 불과 1~1.5도 높았을 뿐이었다. 한반도의 뵐링기는 연평균 기온이 지금보다 대략 7도 정도나 낮은 여전히 매우 추운 시기였다. (…) 빙하기의 혹독한 환경에서 한반도의 사람들이 야생 벼를 발견해 벼 농경과 유사한 행위를 한 것이 설사 사실이라 해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또 있다. 한반도에서 이렇게 이른 시기부터 벼 농경을 시작했다면 홀로세 내내 그 흔적이 발견되는 것이 정상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3500년 전에야 벼 농경의 증거들이 발견되기 시작한다. 또한 법씨가 발견된 토탄지에서 벼의 다른 잔재들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도 이상하다. 이는 외부에서 이 볍씨들만 옮겨져 왔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실제 우리나라의 고고학자중 일부는 중국 남부에서 이동한 고대인이나 철새가 떨어트렸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소로리 볍씨를 근거로 벼 농경의 기원지가 한반도였다고 하는 주장은 여전히 과감하게 들린다. 그렇지만 여러 회의적인 시선에도 불구하고 소로리 볍씨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는 것은 사실이므로 이와 관련된 논의의 가치는 충분하다.”
일반적인 미디어에서 소로리 볍씨 소식을 처음 접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기후’라는 프레임을 두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평가하는 입장은 만나지 못했을 거고, 그렇다면 ‘세계 최초’ ‘세계 최고’ 같은 타이틀에 혹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역사학자, 고고학자들의 논쟁에 고생태학을 전공한 지리학자가 참전하니 논의가 풍성해졌을 뿐더러 좀더 객관적이 되었습니다.
저자는 볍씨 몇십 톨이 나온 것보다 그것이 지속 가능한 환경이었는지에 관심을 갖습니다. ‘기후’라는 프레임으로 접근하면서 계속 같은 물음을 던지는 것인데, 무엇을 ‘농경문화’라 평하려면 그것이 한두 해 잠깐의 문제가 아니라 적어도 몇 백 몇 천 년의 시간 동안 비슷한 정도로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아마도 소로리 볍씨를 둘러싼 논쟁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그 논쟁이 고생태학이나 기후학의 참여로 좀더 생산적일 것이라고 기대해도 좋겠습니다.
송국리 문화
소로리 볍씨만큼이나 인상적인 것이 ‘송국리 문화’에 대한 접근입니다. 《기후의 힘》에서 송국리 문화를 다루는 대목은 역사 이야기이면서 지금 현재에 대한 코멘트이기도 합니다. ‘기후 난민’의 이야기로 이어지기 때문이죠.
소로리 볍씨는 이 책에서 처음 만났지만 송국리 문화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부여와 공주는 ‘한성백제’가 남쪽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 백제의 수도였던 도시들로 묘한 경쟁의식을 갖고 있는데, 백제 이전에 더 오래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적 연원으로도 경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공주는 석장리 유적 등 한국 구석기문화의 생생한 증거를 바탕으로 수만 년 역사를 자랑하고 있으며, 부여는 3,000여 년 전 금강 중하류를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송국리 문화를 통해 한반도 청동기시대의 중요한 장소임을 어필하고 있습니다.
송국리 문화는 청동기 시대 벼농사를 지은 사람들이 만든, 한반도 최초의 문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송국리는 1974년 처음 발굴조사가 시작된 이래 현재까지 25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요, 지금은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입니다. 부여박물관에 가면 당시의 청동기와 토기 등이 방대하게 전시되어 있습니다.
“송국리 문화는 대략 3000년 전부터 금강 중하류를 중심으로 발전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2700~2400년 전에 이르면 전라도와 경상도 서부의 기존 문화들이 대부분 송국리 문화로 대체되는 모습이 나타난다. 이러한 남쪽으로의 문화 확산이 2800년 전의 기후 악화와 관련이 있지는 않을까? 농경민들이 기후적으로 벼농경에 유리한 지역을 찾아 이주하면서 송국리 문화 유형은 점차 남쪽으로 전달되었을 것이다. 이들 중 일부는 아예 바다를 건너 일본 규슈 일대에 도착해 일본의 야요이 시대를 열었다. 벼농사는 온난습윤한 규슈 지역에서 훨씬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왜 남쪽으로 전파되기 시작했을까. 왜 일본으로까지 넘어간 것일까. ‘기후 탐정’의 자세로 접근하는 저자의 문제의식은 여전합니다. 2,800~2,700여 년 전 한반도에 큰 가뭄이 발생했습니다. 이 시기 퇴적된 꽃가루 중에서 나무 꽃가루 비율이 현저하게 떨어지는데, 가뭄으로 나무의 꽃가루 생산성이 많이 감소했음을 의미합니다.
흥미로운 건 이때 사람들이 모여 사는 주거지의 수도 큰 폭으로 감소했다는 점입니다. 벼농사가 가능한 곳을 찾아 떠돌아다닌 것이죠. 이후 송국리 문화는 한반도 남부를 거쳐 일본으로 넘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온난습윤한 기후의 규슈 지역에 처음 정착했을 것이고, 거기서 쉽게 벼농사를 지었을 것입니다. 일본 야요이 문화는 2,500~2,300년에 시작됐다고 하는데, 시기적으로도 맞아 떨어집니다. 기후 난민이 다른 사회에서 새로운 문화를 일군 주체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여러 이유로 난민이 발생하고 그것이 큰 정치적·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난민이 발생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기후입니다. 가뭄으로 혹은 홍수로 평소와 같은 농업 생산이 불가능해지면서 결국 수십 수백 (혹은 수천!) 년을 살아오던 땅을 떠나는 것입니다.
기후의 힘은 완강하고 개인이나 집단의 의지로 막을 수가 없습니다. 한반도 남부, 금강 중하류에서 처음 벼농사를 지으며 동검과 민무늬 토기 등 독특한 청동기 문화(뒤에 ‘송국리 문화’로 이름붙는)를 일군 사람들도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혹독한 가뭄이 계속되자 더 남쪽인 전라도와 경상도로, 그리고 일본으로까지 넘어갔습니다. 지금이라면 국경을 막고 제한적으로 비자를 발급하고 거기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난민촌에서 텐트 생활을 해야 했겠죠.
이어서 나오는 많은 일들도 소로리 볍씨나 송국리 문화의 남진과 비슷한 방식으로 이야기됩니다. 한반도에도 여러 기후적 사건들이 있었고 그것이 당시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의 역사에 슬그머니, 하지만 결국은 강력하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어떤 사건은 기후의 눈으로 점검해 아직 역사로 인정받지 못했고(소로리 볍씨), 어떤 사건은 그 문화의 발생부터 전파, 소멸(송국리 문화)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기후의 영향 아래에서 이루어졌음을 이야기합니다.
《기후의 힘》은 선명하게 ‘기후의 힘’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오래오래 천천히 읽으며 인간의 역사에 기후를 대입해보는 ‘생각의 힘’을 길러줍니다. 이상기후/기후이변의 시대에, 기후 난민이 어색하지 않은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대비할 수 있을까요? 아니 무엇에 대비할 수 없을까요?
《기후의 힘》을 읽으며 그런 과감한 상상을 해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