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출신 조각가 제이슨 디케리스 테일러(Jason deCaires Taylor)는 바다를 전시공간으로 삼아 조각 작품을 만드는 독특한 예술가입니다. 그냥 작품을 발표하는 것만이 아니라 세계의 몇몇 바다에 자신의 조각 작품으로 미술관(조각공원)을 만드는 바다 공간 디자이너이기도 합니다.
2006년 처음으로 중남미 카리브해의 동남쪽 끝에 위치한 그레나다섬에서 <길 잃은 특파원>이라 제목 붙인 작품을 바다에 빠트리기 시작한 이후 그는 세계 여러 지역의 바다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조각 작업을 계속 바닷물 속에 빠트리고 있습니다.
그중 그의 명성을 세계적으로 만들었던 것이 2009년 멕시코 칸쿤 앞바다에 들어선 수중 미술관이었죠. 500점의 작품이 들어선 그 수중 미술관은 ‘바다 환경의 복원’이라는 작가의 비전이 처음으로 구현된 멋진 프로젝트였습니다.
코로나 시대의 미술관
최근 전 세계 미술관·박물관의 가장 첨예한 이슈는 2020년 1월부터 시작된 팬데믹 상황에서 어떻게 ‘코비드-19 친화적인 미술관·박물관’으로 거듭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2020년에는 국내를 비롯해 전 세계의 많은 미술관·박물관이 문을 닫거나 혹은 기획된 전시들을 연기하거나 축소 개관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올해는 사정이 조금 나아져서 예약제를 통해 관람 인원을 조정하거나, 온라인 전시(랜선 전시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소개되는)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면서 팬데믹 상황에 적응하고 있습니다.
2021년 1월, 프랑스 남부 리비에라 해안의 휴양도시 깐느(영화제로 유명하죠) 에 문을 연 ‘깐느 수중 미술관(The Underwater Museum of Cannes)’은 코비드-19 친화적인 미술관을 적극적으로 내세우면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코비드-19 친화적인 미술관이라니 무슨 비법이라도 있는 것일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테일러가 수십 년째 추진하고 있는 수중 작업과 수중 미술관입니다.
‘수중’에서 우리는 서로 대화할 수 없고, 술을 마시거나 식사를 함께할 수도 없습니다. 물이나 음료를 마시느라 잠시 마스크를 내릴 수도 없죠. 밀접한 거리 내에서 서로 비말을 교환하며 바이러스에 노출될 걱정에서 벗어난, 완벽한 장소가 수중인 겁니다. 그래서 ‘깐느 수중 환경 미술관’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곳은 여러분이 다른 모든 사람들과 사회적으로 거리를 둘 수 있는 장소입니다.”
야심만만한 바다
수중 미술관은 깐느에서 페리를 타고 15분 거리에 있는 셍뜨 마흐그히뜨(Sainte-Marguerite) 섬의 남쪽 해안에 있습니다. 해안에서 84~132m 떨어진 바다 속 3~5m의 물 아래 여섯 개의 조각상이 서 있는데요, 크기는 각 2미터, 무게가 한 작품당 10톤에 이릅니다.
깐느의 바다 속에는 어떤 작업이 들어섰을까요? 바로 사람들의 얼굴입니다. 깐느 인구의 다양성을 대표하는 여섯 명의 시민들의 얼굴이죠. 모리스 메렌다, 78세, 어부/선장. 으젠느 쿠스토브, 30세, 자영업자. 아누크 방젱, 7세, 초등학교 2학년 여학생. 노르 브라다이, 20세, 학생. 마리옹 보댕, 29세, 문화 중재자. 도미니크 로열, 54세, 직원. 이들 여섯 명의 얼굴이 2미터의 조각작품으로 바뀌어 바다가 예술과 만나는 지점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여섯 개의 조각상을 관통하는 테마는 ‘마스크(Mask)’입니다. 팬데믹 상황 속 우리가 매일 쓰고 있는 마스크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 더 오랜 연원의 마스크를 염두에 두고 지은 제목입니다. 가면. 인간은 문화와 도덕, 윤리의 가면을 쓰고 비로소 사회를 구성하고, ‘인간’이 될 수 있었던 게 아닌라고 생각하는 테일러는 사람들 사이 관계의 또 다른 얼굴로서 가면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한편 테일러는 바다를 가면으로 해석하는 과감함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우리가 바다를 볼 때 바다는 마치 가면과 같아서 그 밑에 무엇이 있는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나는 이 가면 아래에 실제로 매우 아름답고 연약한 공간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2006년부터 수중 조각가로 독특한 바다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제이슨 디케리스 테일러와 2014년부터 깐느 시장을 맡고 있는 다비드 리스나르는 이 아름답고 연약한 지중해 바다의 보물 같은 장소를 오래 보전하겠다는 야심만만한 계획을 세웠고, 이제 막 그 시작을 알린 셈입니다.
가면 아래의 아름답고 연약한 공간. 바다 표면 아래의 아름답고 연약한 공간 속에 자리잡은 여섯 개의 조각작품은 이제 바다 밑 환경/생태계의 한 구성요소가 되어 수중 생물들의 서식지로 서서히 변화해갈 것입니다. 이는 바다 환경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 중성 시멘트의 사용 덕분에 가능해진 것이기도 합니다.
다비르 리스나르 시장은 이 계획을 추진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잔소리를 늘어놓는 대신 구체적인 조치를 취하기로 했습니다. 이 작품들은 생물 다양성의 피난처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보물인 자연과 인간의 특수성인 문화 사이의 만남입니다.”
역사의 작은 얼룩 그리고 바다 속의 가면들
가면(Mask)이라는 주제는 한편 이 장소의 역사와도 연관이 있습니다. 셍뜨 마흐그히뜨섬이 역사적으로 잠깐 유명했던 기회가 있었으니 바로 1687년부터 1698년까지 이곳 섬에 갇혀 있었던 ‘철가면’ 덕분입니다. 아직도 역사학자와 호사가들의 연구 대상인 이 미스테리한 존재 때문에 섬은 프랑스 역사에서 다 지워지지 않고 작은 얼룩 같은 존재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는 거대하고 두꺼운 두께의 역사책에 남은 작은 얼룩. 시시하고 미미한 얼룩이었을 뿐이지만 프랑스 문학의 두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볼테르와 뒤마는 이 역사로서의 ‘철가면’ 이야기에 매혹되면서 영영 프랑스인들의 마음에 남게 되기도 했습니다.
이제 셍뜨 마흐그히뜨섬의 남쪽 바닷가에는 17세기의 ‘철가면’ 대신 21세기의 ‘콘크리트 가면’이 여섯 개 들어섰습니다. 이 콘크리트 가면들도 철가면처럼 전설이 될 수 있을까요? 테일러는 이곳 깐느의 바다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다 중 하나라고 이야기하면서 작업을 제안 받고 너무 기뻤다고 이야기합니다. 그의 말을 잘 헤아려보면 ‘깐느 수중 미술관’이 벌써 전설의 영역으로 들어섰다는 걸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조각작품이 어떻게 발전하고 있는지 보기 위해 매년 다시 오고 싶습니다. 저에게 이것은 과정의 시작일 뿐입니다. 바다에 던져지는 순간부터 작품들의 삶이 시작됩니다. 그들은 살아 있고 진화하는 예술 작품입니다. 그리고 해마다 다르고 방문할 때마다 새로운 경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모든 작업은 해양 환경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깐느에서 당신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다가 주는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바다는 단순히 낚시를 하러 오는 곳이나 물건을 가져오는 곳이 아닙니다. 바다는 우리가 돌려주어야 할 대상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소중히 여기고 신성한 공간으로 여겨야 할 그 무엇입니다.”
제이슨 디케리스 테일러(Jason deCaires Taylor)는 자신이 바다의 아래에 만든 작품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